[펌]프랑스 유로 스포츠 필립 펠리씨에 인터뷰(딴지일보)
당신의 해설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작년 세계 선수권의 <죽음의 무도> 이후 당신의 멘트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김연아 선수의 경기 이후에는 말할 시간이 부족해 보였는데 지금은 시간제한도 없으니,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4명의 피겨의 전설이 있어요. 소냐 헤니, 페기 플레밍, 카타리나 비트, 그리고 김연아에요. 김연아에게 어떤 형용사를 써야 할 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현실을 벗어난 환상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거나. 이 4명의 전설 중, 살아있는 전설이고, 또 지금, 여기, 우리 앞에 현존하고 있으니 얼마나 환상적인가요. 그녀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에요. 피겨계의 기적이기도 하고 인간 문명, 스포츠가 아닌 예술 전체의 기적이기도 해요.
어제의 쇼트 경기는 어떻게 보셨나요?
물론 중계를 했죠. 방송을 봤나요? 못 봤군요. 어제의 쇼트를 망쳤다고 슬퍼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브라이언 오서도 기분이 별로인 듯 냉랭한 분위기를 하고 있더군요. 그녀 스스로도 낙심할 필요가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관중들도 마찬가지에요.
어제의 쇼트 프로그램조차도 아름다웠거든요. 우리가 그녀가 우리와도 같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스핀을 놓치기도 하고, 경기가 끝난 뒤 고개를 젓기도 하는 그녀는 우리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인걸 보여주잖아요.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성스러운 경지에 이른 모습만 보여줬어요. 인간으로서는 다다를 수 없는, 우리를 어딘 가로 데려가는 그런 신적이고 경이로운, 무언가를 초월한 모습을요. 빙판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거나, 잠깐 인간의 모습을 빌린 여신처럼 보이지 않나요? 올림픽에서의 경기가 바로 단 적인 예에요. 모든 것이 완벽하고 흠잡을 것 없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런걸 보면 우리는 할말을 잃게 됩니다. 유로 스포츠의 중계 정책이 경기 중에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거에요. 경기 이후, 영상이 다른 앵글로 비춰질 때 집중적으로 멘트를 하기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녀의 경기를 볼 때면 이때쯤 멘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아요. 빙판 위에 나타난 그녀의 존재 자체에 압도되어 버려요. 너무 절대적인 경지니까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뜻인가요?
그래요.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그림을 보러 갈 필요가 없어요. 김연아 자체가 이미 박물관에 걸린 그림이나 조각상이에요. 그런데 어제는 뭔가 지친 모습,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줬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우리와도 같은 인간이구나, 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불완전한 구석이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이 예술을 하는 모든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함, 이상적인 미에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 때문이잖아요. 바로 그걸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나름 뜻 깊은 쇼트프로그램이에요?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면 저렇게나 온전하고 흠없는, 신적인 초월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증거하고 있는 게 김연아의 스케이팅의 의미에요. 나는 어제의 쇼트프로그램에 실망하지 않았어요. 프리에서 올림픽 때만큼의 경기를 보여준다면 장담하는데 금메달은 그녀의 것이에요. 어제의 경기는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경기들처럼 초월적이고 압도적이지 않았지만 빙판 위의 그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무언가이고, 그걸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었으니 어제의 경기도 훌륭했고 오히려 더 대단한 것이었어요. 적어도 내 해석은 그래요.
방송 해설자로서 객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더 대단한 경기라는 당신의 해설은 다른 흔한 미디어와는 좀 다른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예술이 예술 스스로의 섬세함을 잃는 거에요. 우리가 완벽함과 이상적인 경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이 어떤 고정불변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스케이팅에서의 완벽한 경지란 고정된 것이 아니거든요. 언제나 흘러가는 듯, 변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대략 이쯤이다, 하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요.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가 되는 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면이에요. 김연아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우리랑 똑 같은 인간이에요. 섬세하고,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실수 한 뒤에 머리를 저으며 실망한 표정을 짓기도 하는 그런 인간이요. 그런 섬세함을 우리에게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해줬는데 왜 놀랍다, 실망이다, 이런 말을 해야하나요? 내 눈엔 여전히 아름답게 보이는걸요. 그리고 그게 사실인걸요. 주관적이지 않냐고요? 당신 기사는 객관적이라고 자부해요? 세상에 객관적인 게 어디 있어요? 기자든 작가든 이미 글을 시작할 때, 의도를 가지고 시작해요. 기자들이 기사의 객관성을 운운하는 건 그들이 경기장에 앉아서 음식 그릇에 코 박고 있는 것처럼 사소한 내용들을 대단한 진실인양 기사로 쓰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그마저도 문장이 되고 글이 되는 순간 이미 쓰는 사람을 지나게 되고 그 통과의 과정 이후엔 객관적일 수 없는 거에요. 점수와 결과를 늘어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그건 홈페이지에 가서 프로토콜 내역을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 내용을 읊는 건 의미가 없어요. 적어도 피겨에서는 그렇죠. 나에게 피겨는 그냥 스포츠가 아니라 스포츠 이전에 예술이거든요. 예술을 논하는데 무슨 객관성이에요. 판정하는 심판들 조차 객관적이지 않아요. 이 시스템 안에서 애써 객관적인 척을 하는 거지 이미 주관에서 출발하는 영역이 피겨에요.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어제의 쇼트를 보고 재앙이다, 최악이다, 라고 안타까워 하면서 표면적인 결과에 연연할 수도 있어요. 그건 좀 얕고 깊이가 없지만 그 나름대로 또 다른 해석이에요.
내 해설이 싫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채널을 보면 그만 아니겠어요? 피겨는 예술이에요. 물론 스포츠 종목이고, 기술적인 면도 크게 작용하지만 예술적인 면이 없다면 그건 피겨가 아니에요. 그냥 점프대회나 스피드 스케이팅을 하면 그만 아닌가요? 피겨를 논하는데 그만한 관용(해석의 차이를 받아들일)도 없다면 왜 피겨를 보나요? 안타깝게.
나는 직접 피겨를 했던, 스케이터로서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고, 지금은 아니지만 2004년까지도 코치로서 현장에서 일했어요. 지금도 특별 레슨을 하고 있어요. 한 해도 쉬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당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에요. 요즘의 해설들을 보면, 지나치게 기술적인 면만 언급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일반적인 이야기만 하거나 하더군요. 그렇게 치우친 해설은 별로 좋은 해설이 아니에요. 난 누구보다 피겨를 잘 알고 있고 피겨는 내 삶의 일부분이에요. 한마디로 전문가인 셈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이거죠. 누구보다 피겨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해요.
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해요. 치우치지 않고 기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그들이 빙판 위에 가져오는 감동과 예술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내 해석을 덧붙여요. 그렇게 하는 게 올바른 해설이라고 믿어요. 그런 내 해설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냥 나와서 시간 때우기 식으로 떠드는 다른 해설을 보면 그만이죠.
내 해설은 내 글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그는 직접 쓴 희곡에 연출을 맡아 빠리 마레지구 소극장에서 6개월의 장기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글을 쓸때처럼 똑같이 생각을 하고, 단어를 고르고 내가 전하려고 하는 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말하려고 애쓰면서 해설을 합니다.
김연아와 다른 스케이터들과의 차이점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한다면요?
김연아는 신의 경지에 다다랐고 나머지는 그냥 인간인 거에요. 빙판 위의 그녀는 하늘에서 강림한 여신처럼 보이죠. 아무런 애를 쓰는 것 같지도 않게 너무 쉬운 듯 보이잖아요. 다른 선수들은 낑낑거리고 애를 쓰는게 눈에 보이는데. 그 갭이 너무 크고 다른 스케이터들과의 차이는 눈에 띄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냥 인간인 다른 스케이터들은 좀 불쌍해진 거에요. 왜냐? 김연아를 본 관중들을 그 이상으로 감동시키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예를 들어 보자면, 현재의 숱한 피아니스트들, 기술적으로 대단하잖아요. 빠리 음악원 졸업반 정도만 되어도 어렵기로 소문난 곡들을 척척 연주해내요. 난해한 현대 음악도, 리게티 에튀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비르투오조들에게서 진정한 거장이라는 인상은 받기가 힘들어요. 신선하긴 하지만 가슴이 떨리고 온몸에 전율이 오는 것 같은, 호흡을 잠시 잊을 것 같은 그런 감동을 받나요? 난 아니에요.
그들은 전속력으로 돌진해가는 연주 기계랄까. 기교에 압도될 수는 있지만, 그걸 감동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들이 작곡가들이 악보로 남겨놓은 음악을 넘어서서, 그걸 흉내내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무언가, 음악 전체를 전해주는 통로이자 독보적이고 유일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 될 수 있다면 그냥 연주자를 넘어선 음악이 됩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나 호로비츠처럼요. 그들은 기교적으로도 이미 완성이 되어있지만, 단순히 그 명징한 비르투오시즘에 그치는 게 아닌, 그 이상을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줬고 그렇게 역사에 남았어요. 그게 진짜 감동이고 불멸의 음악이에요. 연아와 다른 선수들과의 차이는 바로 이거에요. 물론 기술적으로도 그녀보다 우월한 스케이터들은 현재 없어요. 다른 선수들이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비르투오조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를 감동시키는 지점에는 다다르지 못할 거고요. 마오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 제대로 해낸다면 대단한 기술이긴 해요. 하지만 그거 하나로 피겨를 논할 수는 없어요. 이건 점프 대회가 아니니까요. 점프의 난이도만으로 피겨를 논한다면 무얼 위해 우리가 이 모든 걸 다 하고 있죠? 의상은 왜 굳이 제작하고, 음악은 왜 편곡하며, 몇몇 수준이 되지 않는 선수들은 음악에 질질 끌려 다니며 가끔 우스꽝스러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애쓰며 안무를 집어넣죠? 삐걱대는 바이올리니스트들처럼 참아주기 힘든 모습을 봐야 하는 수준의 선수들도 꽤 된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의 해설에서 가장 놀라운 건 당신의 단어 선택과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 그리고 확신에 찬 자세에요. 그렇게 확신에 찬 해설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배경이 있나요?
나는 철학을 전공했어요. 68혁명 이전에 낭떼르와 소르본에서 엠마누엘 레비나(Emmanuel Levinas)의 강의를 들은 세대에요. (빠리의 대학을 비롯한 프랑스의 국립대학들은 68년 혁명이후 평준화 되었다.)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으니 참 행운이었어요. 당신의 젊음이 부럽긴 하지만, 레비나의 강의를 들을 수 없는 세대인 것은 안타깝네요. 2004년 까지는 코치를 하고 있었고, 젊은 시절엔 피겨선수로서 2번의 올림픽에 참가했어요.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고, 빠리에서 종종 전시를 하고, 희곡을 쓰고 직접 연출해 무대에 올리기도 해요. 작년에도 6개월간 공연을 했어요. 유로 스포츠의 중계도 물론 하죠. 이게 별도로 따로 하는 일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의 연장선에 있어요. 글을 쓰고 문장을 고르듯이, 그림을 그릴 때 영감을 찾듯이 해설을 해요. 적어도 나에겐 이 영역과 저 영역을 구분하는 건 좀 부질없는 일이에요.
김연아에게 앞으로 기대하는 새로운 면이 있다면요.
당신 조금 전에 쇤베르크 이야기를 했어요.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에서는 시간을 뛰어넘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당신 말에 동의해요. 김연아의 연기는 언제, 다시 봐도 늘 새롭고 감동적이고, 초월적이에요. 그녀가 프랑스 음악에 맞춰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알다시피 사실 프랑스 음악이 쉽지 않은 음악이거든요. 섬세하고 까다롭고 미묘해요. 프랑스 와인처럼요. 음악에 이미 색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생상스는 그의 죽음의 무도를 연기한 김연아를 봤다면 무덤 속에서 기쁨에 겨워 춤을 출지도 몰라요. 그건 정말, 대단했죠. 작년 세계선수권에서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 강렬한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서 그녀는 음표가, 불멸의 음악이 되었단 말이에요. 참 어려운 음악인데.
그녀가 다음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면 저는 강력하게 라벨과 드뷔시를 권하고 싶어요. 인상파의 그림과도 같이 색채를 지니고 있는 음악들이에요.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이 음악을 온전히 표현해 내려면 참 어려울 것이고, 그건 스케이터들에게도 마찬가지일거에요. 그러나 김연아라면 가능할거에요. 우리를 다시 한번 어딘가로 데려가는 연기를 펼쳐주겠죠. 진정으로 이 섬세한 음악의 색채를 그려낼 수 있는 유일한 스케이터에요. 그리고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은 동양적인 선율과도 맞닿아 있어요. 당신도 알고 있죠? 20세기 초반,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였던 빠리에 전해진 동양의 문화에 드뷔시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김연아는 세계적인 선수이지만 동시에 한국인이고 동양인이죠. 그러므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음악을 고른다면 아주 특별한 음악과 일치되는 프로그램을 표현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작년 그랑프리 시리즈에서는 안타깝게도 방송에서 당신의 해설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빠리에서 트로피 에릭 봉빠르 취재 도중, 앞줄에 앉은 당신의 목소리가 참 낯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 때도 역시 해설을 하고 있더군요. 흥미롭게 귀 기울여 들었답니다.
국제 빙상 연맹은 그랑프리 시리즈의 중계권 가격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했어요. 유로 스포츠 내부에서도 국제 빙상연맹과 오랜 토론이 있었어요. 친콴타 회장은 중계권료 때문에 유럽 전체의 중계를 포기한 셈이에요. 끝끝내 유로 스포츠에 가격을 낮추어 넘기지 않았으니까요.
이번 시즌 내내 김연아는 정말이지 대단했는데, 그랑프리 대회의 중계를 하지 못한 건 참 아쉽네요. 난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에 대한 나만의 감상을 남기고 싶거든요. 나는 내가 단순한 해설자라기 보단, 예술 비평가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상이 피겨스케이팅인. 그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하고, 통찰력을 갖춘 채 문장을 생산해 내는 일이랄까. 그리고 프랑스어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섬세한 언어라는 거, 당신도 알고 있죠? 물론 트로피 에릭 봉빠르에서 김연아를 볼 수 있긴 했지만, 중계를 하지 못한 건 많이 아쉬웠어요.
김연아를 두고 여신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엄연한 인간이고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어요. 한국에 피겨스케이팅 전용 링크가 있나요? 선수들은 얼마나 되나요? 그녀 이후를 기대해도 되나요? 김연아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을 내고 닦으며 이곳까지 왔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직접 문을 열고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 세계를 사로잡았어요. 아까 내가 말한 4명의 다른 전설과 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이미 시스템이 존재하던 곳에서 나타난 단순한 재능 있는 스케이터가 아니란 점이에요. 어떤 피겨의 전통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등장해 한국인으로서 어떤 경우에서든 최초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잖아요. 무슨 메달을 따든 그녀가 하는 건 다 최초가 아니었나요? 올림픽에서, 온 국민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야 했던 순간의 그 부담감을 생각하면 참 놀라워요. 우리는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싱글부문 금메달이니까요.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완벽한 것도 놀랍지만 나아가 거기에 정신적으로도 그녀는 완전히 무장되어 있다는 게 김연아의 가장 놀라운 점이에요. 챔피언이 가져야 하는 미덕이죠. 몇몇의 다른 스케이터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강인함이기도 하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의 연기에 해설을 덧붙이는 일에 지나지 않겠죠. 시간이 흘러가고,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우리의 노화를 확인하듯, 그녀 역시 언젠가는 스케이팅을 그만 둘 날이 올 거에요. 그날을 생각하면 어쩐지 벌써 아쉽군요. 모쪼록 오랫동안, 이 진하고 절대적인 감동을 불러오는 존재로서 스케이팅을 해주길 바랄 뿐이에요.
좋아하는 화가로 세잔과 칸딘스키, 모네와 반 고흐를 순서대로 꼽으며, 엠마누엘 레비나의 저서와 강의록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던 그와의 인터뷰는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야 끝났다. 다음날, 그는 다른 유로스포츠 해설자들과 함께 대기 상태로 중계를 기다렸으나 끝내 타종목목 중계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시간상의 이유로 프리 중계를 하지 못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링크를 돌며 인사를 하고 있는 스케이터들을 보며 자리를 정리하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이건 그냥 새롭게 느낀 건데, 저 푸르디 푸른빛의 드레스에는 은색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녀가 금메달이기를 바랐고, 프리에서 따라 잡을 수 있을거라고 믿고 포디움의 꼭대기에 서기를 바랐지만 저런 색의 조화를 보는 것도 나름 신선한데요?
듣고 보니 그럴 듯 하다며 답을 하는 나에게 그는 6월에 하는 전시에 꼭 와달라며 샹젤리제 부근 갤러리 주소를 적어주었다.
토리노, 2010년 3월 27일.
필립 펠리씨에. 1947년 11월 30일 빠리 근교 불로뉴 출생. 어린 나이에 피겨 스케이팅 시작, 특별히 예술적인 해석력에 재능을 보이며 페어에 이어 남자 싱글 스케이터로서 활동했다. 14살의 나이에 이미 첫번째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스케이터로서 조금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다. 낭떼르에서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철학학위를 받으며, 이어 소르본에서 수학한 그의 지도 교수였던 엠마누엘 레비나와는 스승으로서, 친구로서, 학문적 동지로서 평생 교류를 유지한다.
아방가르드적인 신 경향을 추구하며 코치와 안무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당시 전통에 머무르고자 했던 피겨스케이팅계의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창조적이고 독특한 안무는 시대를 뛰어넘는 현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창조적인 행위는 피겨 스케이팅에 그치지 않고, 희곡과 그림전시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실험적인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2008년 12월, 그의 희곡 중 하나인 <부르하하>는 빠리의 마레지구에서 상연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전문 분야인 춤과 신체적 움직임을 배우들의 연기에 결합하는 시도를 선보이며 연출가로서의 자질도 발휘한다.
현재 필립은 빠리의 외곽에서 그가 가장 애정을 보이는 글쓰기와 그림에 시간을 보내며 그의 내면 세계를 현실화 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